"형! 기독교인에게 결국 남는 건 하나님밖에 없어요. 부처님 믿는 사람에게는 부처님밖에 안 남아요. 그런데!!!! 나한테는!!! 명희밖에 안 남았어요!!!"
어이가 없었다. 진부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대사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한 말도 아닌데, 내가 쪽팔렸다. 녀석이 다음에 외친 말은 더 부끄러웠다.
"그래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죽음밖에 없어요!! 죽음을 통해서 레테의 강을 건너는 길만이!!! 명희를 잊을 수 있는 길이에요!! 엉엉…"
정적이 찾아왔다. 잔뜩 놀릴 수 있는 타이밍인데, 짓궂은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녀석은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 앞에서 칼을 들고 죽겠다고 난리를 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완성한 대사를 술이 덜 깬 형들 앞에서 하고 있으니. 우리는 또 욕을 해 댔다. 그래, 그냥 죽어라. 여기 칼 줄 테니까 어디 한번 죽어 봐라. 너한테 남은 길이 그것밖에 없다는데 어떻게 말리겠냐. 녀석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이렇게 많이 나올 수 있구나 싶었다. 다시 울고, 소리치고,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내뱉던 녀석은 결국 지쳐 쓰러졌다.
우리는 녀석에게 옷을 입혔다. 전투복 바지 밑단에 고무 링을 채워 줄까 하다가 그냥 주머니에 넣어 줬다. 택시를 잡아 녀석의 집까지 갔다. 녀석은 집 앞에서 다시 쓰러졌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올 때까지 기다려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잘 살아. 그리고 잘 잊어 봐. 쓰러진 녀석은 말이 없었다. 태안과 나는 중국집으로 향했다. 한바탕 소동 덕분에 술은 깬 듯했지만, 개운하지 않았다. 삼선짬뽕에 소주를 마시면서 녀석의 마음을 생각해 봤다. 가 버린 여자 때문에 죽겠다고 행동하는 사람을 정말 눈앞에서 보다니. 기독교인에게 남는 건 하나님밖에 없고, 불교 신자에게 남는 건 부처님밖에 없다며 '레테의 강'을 운운할 정도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심지어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쪽팔리는 기분도 없었던 걸까. 태안이가 술을 따르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덜떨어진 놈이라고…"
"너희 집에 텔레캅 같은 경비 시스템이라도 갖춰 놔야 하는 거 아냐. 저 새끼 분명 또 올 거 같은데…"
"진짜 그래야 되나… 어차피 1년 후면 나가야 하는데…"
"아, 그러네. 그런데 너희 동네 재개발 분담금이 얼마나 되는 거야?"
태안이와 나는 그렇게 계획에 없던 이틀 차 음주를 시작했다. 아침의 소동과 재개발 이후의 미래를 안주 삼은 술자리는 다음 날 새벽 2시쯤에 끝났다. 그래도 그날은 태안의 방에서 잠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