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오시는 60대 신사분들 스타일로 부탁드립니다." 최근 다른 일로 바쁜 터라 새로운 이메일을 쓰지 못했습니다. 약 2, 3주 정도는 같은 상황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 예전에 썼던 글 하나를 붙여 놓았습니다. 지난 2024년 한겨레 아카데미에서 소설 습작을 공부하며 썼던 A4 두 장 분량의 단편 소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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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나 체중계는 78kg을 가리켰다. 준결은 안도했다. 지난주보다 1kg이 줄었다. 176cm의 키를 가진 거울 속 남자의 몸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비해 정돈돼 보였다. 5시간 후에 촬영인데, 갑자기 캐스팅을 바꾸지는 않겠지. 준결은 지난 한 달 동안 술을 끊고 매일 운동하며 다이어트를 했다. 10년 만에 들어온 배역이었다. 대기업 이사회 장면에 등장하는 임원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오히려 준결에게는 익숙했다. 한창 일하던 시절 준결에게 주어진 역할에도 이름은 없었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가족과 갖는 상견례 자리에 등장하는 남자 쪽 아버지, 왜 백성의 안위를 살피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임금의 앞에 도열한 신하 중 한 명 등등. 10년 전, 준결이 음주 운전 단속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도 그런 남자들을 연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 적 없던 세상이 그때 유독 큰 관심을 보였다. 모든 음주 운전 사건이, 그것도 단속에 걸린 정도로 뉴스에 나오지는 않는다. 준결은 유명한 탤런트가 아니었지만, '모 방송사 공채 탤런트 A씨'라는 이유로 온라인 뉴스의 표적이 됐다. 일이 끊겼다. 아내와 함께 열었던 고깃집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동료 탤런트들과 방송국 사람들이 그럭저럭 매상을 채워주었다. 준결도 각종 서비스 안주를 내주면서 끈을 놓지 않았다. 심 PD도 준결이 주는 서비스를 기대하며 고깃집을 찾던 방송국 사람이었다. 심 PD는 말하곤 했다. "형님, 다음 작품에 한 번 들어오셔야죠." 그러던 어느 날, 심 PD가 평소와는 다르게 말했다. "형님, 이번 작품에 들어오시죠." 그날 준결은 심 PD에게 고깃값을 받지 않았다. 그가 평소보다 많은 후배들과 가게를 찾은 날이었다.
온탕에 들어간 준결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화요일 오전의 여의도 율촌 사우나에는 두세 명의 노인만 있었다. 이 사우나는 변한 게 거의 없다. MBC가 여의도에 있던 시절, 자주 찾았던 곳이다. 촬영 전에 이곳에서 몸을 씻고 이발실에서 머리를 하는 게 준결의 루틴이었다. 방송국 스태프들이 머리를 해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준결은 이곳의 이발실을 신뢰했다. 주변에 위치한 증권사의 중역들도 이곳에서 머리를 자르고 말렸다. 평범하지만 반듯한 남성을 연기했던 그에게 가장 알맞은 헤어스타일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준결을 알아보는 사람이 꽤 많았다. 주로 MBC 주변의 서울아파트나 공작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들은 TV에서 본 사람과 옷을 벗고 마주했다는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준결도 익숙했다. 준결의 인사를 받은 사람들은 "테레비에 나오시는 분이죠?"라고 묻곤 했다. 준결은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대화는 보통 거기서 끝났다. 그들은 준결의 얼굴을 보고 반가워했지만, 동시에 얼굴 외에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이름 백준결. 출생 1966년 8월 13일. 데뷔 1986년 MBC 공채 탤런트 16기. 포털 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간단한 정보와 출연작이 나오지만, 준결의 사진은 나오지 않는다. 한때 준결의 딸은 네이버에 연락해서 사진을 넣자고 했지만, 준결은 개의치 않았다. 얼굴은 누구나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게 오히려 TV 속에만 사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것이 탤런트라는 직업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도 있었다. 어차피 그는 스타가 되지 못한 탤런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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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MBC 탤런트 공채에서 남자 7명과 여자 8명이 뽑혔다. 준결은 그중에서도 유독 큰 키와 서글서글한 외모를 자랑한 신인이었다. 동기들은 준결이 가장 빨리 스타가 될 거라고 말했다. 준결도 기대가 컸다. 명절 연휴에 방영되는 2부작 특집극의 주연을 맡은 후 주말 드라마의 조연을 거쳐서 수목 미니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는 꿈을 꿨다. PD들도 그를 먼저 데려다 썼다. 주로 반듯한 남자 캐릭터였다. 남자 주인공의 사무실 동료, 여자 주인공의 사무실 선배, 여자 주인공이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남자 주인공 몰래 나간 맞선 자리에 나온 맞선남. 다른 동기들이 불량배, 포졸, 웨이터, 군졸, 인민군, 하인 등의 배역을 맡으며 경험을 쌓던 시절이었다. 동기들은 '떼 샷'이나 '롱 샷'으로만 찍히는 자신들에 비해 최소 웨스트 샷으로 등장하는 준결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준결을 부러워했던 동기 중 한 명은 주말 드라마에서 비열한 사기꾼 역을 맡더니, 극 중에서 여성 캐릭터를 때리는 연기까지 했고, 전국 아줌마들로부터 욕받이가 되었다. 그리고는 바로 영화로 진출해 개성 있는 악역을 수차례 맡았고, 지금도 드라마와 영화에서 거의 주조연급의 중년 배우로 활약 중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 번듯한 맞선남을 연기했던 준결은 나이가 들자, 상견례 자리에 나온 결혼 상대방의 중후한 아버지를 연기하게 됐다.
그래도 준결은 여전히 주요 배역을 맡는 동기들을 크게 부러워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렇게 사는 게 그의 성정에 어울렸던 것이다. 이 나이에도 방송국에 출입하며 젊은 사람들과 일하는 게 좋았다. 여전히 동년배의 일반인에 비하면 꽤 괜찮은 외모를 갖고 있다는 사실도 준결을 뿌듯하게 했다. 한 달에 두어 번씩 교회 간증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간증을 시작한 건, 아내 덕분이었다. 고깃집을 열었을 당시, 준결의 아내는 동네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 신도 중 한 명의 남편이 탤런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 목사가 간증을 부탁했다. 누구나 아는 얼굴의 준결이 신도들의 호평을 받은 건 당연했다. 이후 개척 교회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준결 또한 간증 섭외 탤런트 목록의 아래 순위를 차지했다. 간증을 통해 그는 탤런트로서 매력과 생명력을 인정받는 느낌을 얻었다. 그때마다 준결은 나름 오래된 맞선남의 연기 경력을 가벼운 유머로 쓰곤 했다. "실은 제가 연애결혼을 했습니다만, 드라마에선 정말 많이 봤지요. 서울 시내에 안 가본 호텔 커피숍이 없어요. 여러분 아시는 그 시절 여배우 중에 저랑 맞선 한 번 안 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예배가 끝나면 신도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몰려들었다. 신도들은 마치 평소에 준결의 팬이었던 것처럼 다가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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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결은 이발실에 들어갔다. 이발사는 10년 전의 그 이발사가 아니었다. "여기 오시는 60대 신사분들 스타일로 부탁드립니다." 이발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알았다고 답했다. 의자에 앉은 준결은 그날의 일정을 하나씩 더듬었다. 오후 4시까지 상암동 MBC로 가서 촬영 버스를 타고 5시까지 일산 킨텍스로 간다. 촬영은 6시에 시작이다. 보통은 촬영 전에 저녁 식사를 하겠지만, 오늘은 그냥 먹지 말아야겠다. 이런 날 잘못 먹었다가 갑자기 아프면 안 되지. 대신 촬영이 끝나면 가게에 들러서 시원하게 맥주라도 한 잔 해야겠어. 대사가 모두 4마디였던가. "2025년도 3/4분기 정기 이사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안건은 정민식 사장의 해임 건에 대한 건입니다.", "먼저, 정민식 사장의 입장 발표부터 듣겠습니다.", "이로써 정민식 사장의 해임 건은 부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대사를 외우던 준결은 이번 작품을 계기로 다시 탤런트다운 탤런트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느꼈다. 탤런트. 그래, 배우가 아니라 탤런트지. 준결은 '배우'보다 '탤런트'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배우'라는 말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예술가적 자의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탤런트'는 누구나 갖고 있는 직업 중 하나를 뜻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 기분에 준결은 미소를 지었다.
이발을 마친 준결은 옷장의 거울을 바라봤다. 낯선 이발사가 해준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준결은 세탁소에서 아침에 받아온 정장을 꺼내 입었다. 거울 속의 준결이 10년 전의 준결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준결은 다시 대사를 떠올렸다. "2025년도 3/4분기 정기 이사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안건은 정민식 사장의 해임 건에 대한 건입니다." 그때 준결 근처에서 옷을 벗던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TV에 나오시는 분이죠?" 오랜만에 듣는 인사에 준결도 웃었다.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준결은 옷을 거의 다 입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발장에서 어젯밤에 닦아 둔 구두를 꺼내며 준결은 생각했다. 드라마가 종영하면 다시 심 PD에게 고기를 대접해야겠다고. 이번에는 심 PD가 좋아하는 뭉티기도 내놓아야겠다고. 준결은 시계를 보았다. 상암동 MBC 앞 집결 시간까지는 아직 2시간이 남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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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소품이 아닌 공간이다. 'TV에 나오는 사람'을 사우나에서 만나는 상황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갔던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TV 드라마에서 본 어쩐 아저씨가 있었다. 아버지가 다가가서 물었다. 'TV에 나오는 분이시죠?' 그분은 몸의 물기를 닦는 와중에도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솔직히 그때 나는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아버지가 창피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는 TV에 나오는 사람이면 다 반가운 시절이었다. 지금도 어쩌다가 수양탕 앞을 지날 때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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