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그날 여기에 왜 왔던 겁니까.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보일러' 연통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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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텔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그가 다가와서 말했다. "제가 폰을 두고 와서 그런데 잠깐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정중한 요청이었지만 겁이 났다. 멈칫했더니 그가 다시 말했다. "여기 오피스텔에 사는 친구 집에 두고 왔는데, 그 친구에게 걸어보려고 하는 거예요." 나는 그에게 친구 번호를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번호를 불러주었다. 전화를 걸었다. 여자가 받았다. 나는 폰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폰 너머의 여자에게 말했다. "나 지금 1층에 왔거든? 빨리 나와." 남자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폰을 돌려주었다. 내가 담뱃불을 끄고 꽁초를 쓰레기통에 넣고 오피스텔로 들어가려고 할 때, 한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남자의 차에 탔고, 차는 떠났다.
별일이 아니었다.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 남자의 행동이 이상했다. 이 오피스텔에 사는 친구의 집에 폰을 두고 왔다는 건, 그가 그녀의 집에 방문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호수를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호수를 기억하면 1층 현관의 인터컴에서 그녀를 호출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또 이상했던 건, 그가 여자와 통화를 하자마자 했던 이야기다. "나 지금 1층에 왔거든?"이란 말은 남자가 그곳에 폰을 두고 왔다는 사실과 남자가 폰을 찾으러 온다는 것을 여자가 미리 인지하고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첫마디다. 폰이 없었던 남자는 그녀에게 어떻게 그 두 가지를 미리 알려주었을까. 제3의 인물이 있었나. 나는 그가 폰을 그녀의 집에 두고 오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폰으로 전화를 걸면 안 되는 여자에게 연락을 하려 했을 것이다. 두 남녀는 어떤 관계인가에 대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혹시 이 오피스텔에 음성적으로 운영하는 업소가 있나? 그게 아니면 저 여자에게 남편이 있나?
사실 이게 다 내가 시간이 많아서 그런 거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할 때는 거슬리는 게 없었다. 그런데 퇴사 후에는 별것도 아닌 것들에 신경이 쓰였다. 언제부턴가 이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 평소 오며 가며 보지 않은 얼굴도 있고 외국인도 있었다. 몇몇 세대는 에어비앤비를 돌리고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날은 나와 같이 8층에서 함께 탄 남성 입주민이 4층에서 내리는 걸 봤다. 며칠 후 그 남자는 한 여성과 함께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고, 여자가 4층에서 내렸고, 남자는 나와 같이 8층에서 내렸다.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했다. 부부이거나 연인이라면 같은 집에 살고 있지 않을까. 남매인가? 직장 동료인가? 아니면 여기서 각각 따로 살다가 우연히 싹튼 로맨스로 연인이 된 건가. 이상한 건 아니지만, 불편한 것도 생겼다. 낮 시간에 집에 있을 때가 많다 보니 앞집 남자가 문을 자주 열어놓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문제는 그 집에서 풍겨 나온 냄새였다. 침착맨이 방송에서 '웅취'라고 했었던 그 냄새. 그는 방 안에 가득한 '홀아비 냄새'를 빼려고 문을 열어놓는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도 집에만 있는 사람이었다. 낮에는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그러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의 앞집에 사는 내가 낮에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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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바쁘지 않은 건 아니다. 인간의 뇌는 알아서 바쁘게 움직인다. 영화 ⟨이창⟩의 주인공 제프도 바쁠 게 전혀 없었다. TV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는 시대. 하필 무더운 여름이다. 당연히 에어컨도 없다. 왼쪽 다리를 다친 그는 집 밖에 나갈 수도 없다. 그는 창문을 열어놓고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시간을 버티는 중이다. 관음을 부추기는 여름. 이 관음의 욕망이 얼마나 강하냐면 그레이스 켈리 같은 여자가 찾아와서 키스를 하는데도 눈은 이웃을 향해 있을 정도다.
관음은 곧 스토리에 대한 욕구다. 그는 건너편에 사는 무용수 여성이 여러 남자와 어울리다가 그중 한 남성과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가장 돈 많은 남자를 선택했군"이라고 말한다. 다른 집에 이제 막 이사 온 신혼부부가 창문 블라인드를 닫는 걸 보고는 므흣하게 웃는다. 한 독신 여성이 근사하게 차려입고 연인과의 저녁 식사를 상상하는 장면에서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창⟩을 영화에 대한 영화로 분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객은 눈에 보이는 정보들을 이어 붙이며 영화를 감상한다. 영화에는 자세하게 나오지 않지만, 제프는 이미 건너편 아파트 주민들의 숨겨진 사연을 모조리 추정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새벽, 제프는 앞집 남자가 집에서 나갔다가 들어오는 걸 목격한다. 그 남자는 같은 행동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그 남자와 살던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이상한 행동을 했고, 이후 눈에 보인 건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다. 제프는 이 남자가 평소 자신을 귀찮게 하던 아내를 살해한 후 토막 내어 내다 버렸을 것이란 스토리를 짜고, 이 스토리에 집착한다.
⟨이창⟩은 매혹적인 미스터리 스릴러지만, 사실 일상이 지루했던 남자가 활기를 되찾는 이야기다. 그는 솔직히 신이 났을 것이다. 날씨는 덥고 깁스를 한 다리는 가려운데, 눈앞에서 인터랙티브 영화가 펼쳐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을 돕는 보험회사 파견 간호사와 연인, 형사인 친구를 활용해 단서를 찾는다. 하지만 히치콕 영화답게 그가 세운 가설은 번번이 무너진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의 가설은 사실로 판명 난다. 얼마나 즐거운 여름이었을까. 그는 미스터리로 가득한 스토리를 즐겼고, 자신의 추리를 인정받았으며 나중에는 연인과 함께 행복한 생활을 보낸다. 비록 그 대가로 오른쪽 다리마저 부러졌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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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의 제프처럼 나도 신이 났던 것 같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에게 폰을 빌려주었던 그날로부터 약 일주일 후, 오피스텔 1층의 단골 미용실을 찾았다. 원장님 혼자 운영하는 곳이라 머리를 자르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다. 나는 폰을 빌려 간 남자에게 느낀 이상함에 대해 말했다. 그랬더니 원장님은 별일이 정말 많다고 답했다. "여기 건너편에 저 2층 집이 무당집인 건 아시죠?" 알고 있었다. "그 무당 아주머니도 여기서 머리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에는 과일이 잔뜩 담긴 봉지를 가져다주시는 거예요. 그냥 먹으래요. 그런데 그걸 먹을 수 있겠어요? 분명히 어느 굿판에서 쓰인 걸 텐데. 여기 음식물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어요. 왠지 제가 안 먹을 줄 아는데, 버리기 귀찮아서 준 것 같아요."
대화는 이 오피스텔에 사는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주민이 이 미용실에서 비슷한 대화를 하고 있는 듯했다. 5층에 사는 어떤 남자는 새벽마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옆집 주민이 새벽 1시쯤에 항의했더니 알겠다고 하고는 새벽 2시에 찾아와 지금도 들리냐고 묻더란다. 9층의 어떤 여자는 강아지를 키우는데, 엘리베이터에 강아지가 싸놓은 배설물을 치우지 않고 내렸다가 경비실에서 CCTV로 추적해 발각된 후 오피스텔을 나갔다. 원장님의 이야기 중에 가장 놀라웠던 건, 홀아비 냄새를 피우는 앞집 남자에 관한 것이었다. "그 아저씨가 맨날 여기 앞에서 담배 피우잖아요. 그런데 그때 지나가는 여자들을 항상 뚫어져라 쳐다봐요. 흘낏 보는 것도 아니고 정말 대놓고요. 그런 인상이 있으니까 어쩌다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도 꺼림칙한 거죠. 그런데 고객님 앞집 사는 사람이었어요?" 그냥 궁상맞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공포의 대상이었다니. 이 이야기가 놀라웠던 건, 그런 이미지의 낙차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 또한 관찰의 대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앞집 남자는 낮 시간 동안 복도에 자주 나오는 내가 불편했을 것이다. 자기가 노출시킨 냄새를 내가 맡았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나의 행동과 모습에 이상한 신경이 쓰였던 어떤 주민이 이 미용실에 와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다. '맨날 반바지에 LG 트윈스 로고 박힌 티셔츠 입고 여기서 담배 피우는 아저씨 아시죠?' 그렇게 나를 포함한 이곳의 주민들은 서로를 관찰하고 서로에 대한 스토리를 상상하고 있을 수도. 우리는 남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한번 쓰인 신경은 스토리를 만들고 한번 빠진 스토리에서는 헤어나오기 어렵다. 오피스텔의 스토리에 중독된 나는 요즘 미용실에 갈 때마다 원장님께 먼저 묻는다. "요즘은 별일 없으시죠?" 별일이 없으면 원장님이 나에게 묻는다. "고객님은 별일 없으셨어요?" 이후 여러 가지 별일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폰을 빌려 간 그 남자의 정체만큼 강력한 건 없었다. 당신은 그날 여기에 왜 왔던 겁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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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서신이 이메일로 오가고 있지만, 우체통은 여전히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종종 외출하는 길에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샀다가 1+1이 걸리면, 이 우체통에 넣어놓고 나간다. 잃어버리기는 싫은 물건이 생겼는데 다시 집까지 올라가기는 귀찮을 때, 그렇게 사물함 용도로 쓰는 편이다. ⟨이창⟩에서 제프는 연인에게 부탁해 앞집 남자에게 메모를 전한다. "그녀를 어떻게 한 건가?" 오피스텔의 별일을 추적하다 보면 누군가 내 우체통에도 메시지를 남길지 모르겠다. “그렇게 쳐다봐서 뭘 알아냈나?" 같은 그런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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