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뉴욕에서 가장 외롭고 파괴적이었던 남자가 떠올랐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와 〈택시 드라이버〉, 그리고 뉴욕 |
|
|
*이 글에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
|
지난 3월, 뉴욕에 다녀왔다. 6년간 쌓은 마일리지를 털었다. 2년에 걸쳐 모은 유튜브 수익 계좌에서 달러를 뺐다. 고작 일주일의 여행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거나 그런 건 아니다. 뉴욕 배경의 영화를 볼 때 예전보다 더 친숙하게 느끼는 정도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하 〈노 웨이 홈〉)을 다시 볼 때도 그랬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터 파커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뉴욕 도심을 활강한다. 아래에 보이는 곳은 록펠러 센터 앞 스케이트 장 '더 링크'(The Rink)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와 달리 피터의 활강이 더 외로워 보였다. 숙모는 세상을 떠났고, 친구들은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MJ에게 찾아가 기구한 사연을 털어놓고 싶지만, 혹시 그녀가 위험에 빠질까 싶어 말을 삼켜야만 했다. 〈노 웨이 홈〉의 마지막 장면은 그럼에도 친절한 이웃으로 살아가려는 그의 의지와 안간힘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3월의 뉴욕 여행이 7월의 나에게 피터를 더 안쓰럽게 느끼도록 만든 셈이다.
〈노 웨이 홈〉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역사상 유일한 '새드 엔딩'으로 기록된 장면으로 끝난 만큼, 5년 만에 개봉한 속편 또한 신나게 시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이하 〈브랜드 뉴 데이〉)는 고통에 시달리는 피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허름한 아파트에서 인공지능 비서와 함께 웹슈터를 만들고 범죄가 발생한 곳으로 주저없이 날아가는 그는 자기 파괴적인 워커홀릭이다. 협조 관계의 경찰까지도 그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다. 매일 밤 애드빌을 털어먹고 침대에서 네드의 인스타그램을 엿보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네드의 영상에 간혹 등장한 MJ를 보는 피터의 표정도 마찬가지다. 외로움, 부러움, 그리움, 몸과 마음의 피로가 한데 뭉쳐 몸속 DNA의 균형까지 무너뜨리면서 피터는 종종 파괴적인 충동에 휩쓸리는 지경까지 이른다. 철저한 붕괴.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죽다가 살아 돌아온 토니 스타크의 수척한 모습을 봤을 때보다 더 마음이 쓰였다.
|
|
|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Spider-Man: Brand New Day, 2026) |
|
|
#.2 50년 전, 뉴욕에서 가장 외로웠던 남자 |
|
|
피터가 몸속에서 솟구치는 거미 DNA를 통제하지 못해 경찰을 다치게 만드는 장면에서 그와 비슷한 또 다른 남자가 생각났다.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 비클이다. 뉴욕 여행 전, 대충 떠오른 뉴욕 배경의 영화들을 다시 봤었는데, 〈택시 드라이버〉도 그중 한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브랜드 뉴 데이〉의 피터 파커가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 비클을 바탕에 놓고 밑그림을 그린 인물처럼 보였다. 밤마다 도시를 돌아다니는 남자, 외로움에 사무쳐 잠도 못 자는 남자, 그런 고통에 빠져 있다가 파괴적인 충동에 휩싸이는 남자. 조금 더 무리를 해서 빗대보면 캐릭터뿐만 아니라, 플롯 자체가 흡사해 보인다. MJ를 〈택시 드라이버〉의 베시(시빌 셰퍼드)에, 진 그레이를 아이리스(조디 포스터)에, 대미지 컨트롤 국장 빌 메츠거를 매튜(하비 케이틀)에 빗대고 그들이 결국 총에 맞아 쓰러진 후 병원에서 깨어난 후 세상의 칭송을 받는 것까지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론 트래비스는 내면의 공격성을 끝까지 분출시키는 반면, 피터 파커는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애쓴다는 게 다른 점이다.
그렇게 50년 전, 뉴욕에서 가장 외롭고 파괴적이었던 남자가 떠오를 정도로 피터 파커의 고통은 처절하다. 개인적으로는 피터의 고독에 크게 이입한 탓에 도심을 가로지르는 탱크와의 대결 장면이나 새비지 헐크의 난동이 주는 쾌감에 젖지 못했다. 대신 신날 수 없는 활강 장면에 더 눈길이 갔다. MJ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충격받아 일상복 차림 그대로 비 오는 뉴욕을 날아다니는 순간, 그리고 MJ를 구하기 위해 그녀를 안고 활강을 하던 장면. 특히 모든 걸 알고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MJ를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날아다니는 모습이 울컥했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제 본격적인 연애를 하기로 하고 함께 웹스윙을 하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뜻 톰 홀랜드를 처음 보았던 〈더 임파서블〉에서 부모와 떨어진 그 아이가 연상되기도 했다. 외로운 아이만큼 연약한 존재는 없다.
|
|
|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1976) |
|
|
#.3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의 엔딩 크레딧 |
|
|
〈브랜드 뉴 데이〉는 그렇게 바닥까지 부서진 피터가 잃었던 것들을 하나씩 되찾아가는 이야기다. 다가오는 〈어벤져스: 둠스데이〉를 비롯해 이후에 나올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그는 MJ와 다시 처음부터 연애하고 네드와도 우정을 쌓고, 새롭게 장착한 정체성에 따라 '엑스맨' 히어로와도 공감할 것이다. 다시 예전처럼 신나는 활강도 보여줄 것이다. 다만 나는 그렇게 떠들썩한 미래를 예고하면서도 감정을 차분하게 정리하는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흥미로웠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포함한 마블의 많은 영화는 히어로들의 활약을 짤막한 카툰으로 요약하며 엔딩 크레딧을 보여주었다. 슬프게 끝낸 〈노 웨이 홈〉도 그랬다. 그런데 새로운 시작을 선언한 〈브랜드 뉴 데이〉의 엔딩 크레딧은 뉴욕의 평화로운 일상을 보여준다. 카툰으로 그린 게 아니다. 주요 캐릭터들의 모습은 하나도 없고, 실제 일반인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듯한 장면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안에서 뉴욕이 이렇게 평온하게 나온 적이 없어서 낯설 정도다. |
|
|
공교롭게도 〈택시 드라이버〉 또한 뉴욕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엔딩 크레딧을 올렸다. 트래비스는 손님으로 택시에 오른 베시와 재회한다.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타이밍이지만, 그들은 연결되지 않는다. 베시를 내려준 트래비스는 백미러로 흘긋 뒤를 돌아본 후, 다시 운전을 시작한다. 영화는 이때 그의 눈에 비춰진 도시의 풍경 위로 엔딩 크레딧을 올렸다. 도시의 영웅으로 추대됐지만, 이 도시와 화해할 수 없는 사람의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 그 장면과 겹쳐볼 때 〈브랜드 뉴 데이〉의 엔딩 또한 피터가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엔딩 크레딧 직전 마지막 장면이 네드와 피터가 익숙한 손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라는 점과 연결해보면, 트래비스와 달리 피터에게 이 도시는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춥지 않은 곳이 되었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진정한 의미의 '브랜드 뉴 데이'를 보여주는 연출이라고 할까. 그 장면을 몰입하며 본 이유 또한 지난 3월의 뉴욕 여행 때문일지 모르겠다. 이 정도면 마일리지를 턴 보람이 있다. |
|
|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시사회장에서 받았다.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건 영화에서 중요하게 쓰인 도넛 가게 테이크아웃 컵과 편지를 복제한 굿즈다. 컵 바닥에 '[공컵] 소형 제작 가능 / 제작 및 디자인 상담 환영'이라고 쓰여 있는 게 조금 깨기는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할 것 같다. 40대가 된 후로는 이런 굿즈를 아예 받지 않거나, 받아도 지인에게 주거나 버렸는데 이 컵만은 한동안 갖고 있을 생각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