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붕 세가족〉의 임현식. '순돌이 아빠'로 불렸지만, '최경호'라는 극중 이름을 갖고 있었다.
〈호프〉의해술이아저씨, 그리고당신의임현식
#.1 당신의임현식
나에게 임현식은 〈한지붕 세가족〉의 순돌이 아빠다. 에피소드 하나가 짠하게 남아있다. 무엇이든 잘 고치는 만물박사 순돌이 아빠는 그림도 잘 그린다. 어느 날 그는 부잣집 거실 풍경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순돌이 아빠는 부잣집을 상상한다. 그리고는 넓은 창문과 큰 소파, TV가 있는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그림을 의뢰한 사람은 순돌이 아빠의 그림에 크게 실망한다. 이게 무슨 부잣집이냐, 요즘 다 이렇게 해놓고 산다는 얘기다. 순돌이 아빠는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 상상한 부자의 모습은 사실 부자가 아니었다는 현실 자각 타임. 워낙 어렸을 때 본 드라마지만, 나까지 쓸쓸해졌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임현식은지금도어딘가에서순돌이아빠로불릴것이다. 하지만그는〈허준〉의임오근이자, 〈대장금〉의강덕구이기도했다. 모두 '조력자'로서큰인상을남긴캐릭터다. 〈대장금〉의강덕구는어린장금을친딸처럼키워준양아버지이자궁을드나드는대령숙수로서장금의모험을도운인물이었다. 〈허준〉의임오근은일찌감치 2인자의자리를받아들인남자다. 자신보다늦게약방에들어온허준이훨씬더뛰어나다는걸일찍깨닫고그의조력자가됐다. 지금방영됐다면메타인지가뛰어나다는평가를받았을것이다.
〈호프〉에서 임현식이 연기한 '해술이 아저씨'는 분명 임오근과 강덕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그는 신뢰의 아이콘이다. '해술이 아저씨가 그렇다고 했으면 그런 것'이란 강력한 믿음을 영화 속 호포 사람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 성기(조인성)가 이끄는 동네 청년들은 그러한 신뢰를 역으로 이용해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만들 정도다. 그런 신뢰 때문에 경찰관 성애도 숲에서 괴물을 보았다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파출소로 달려갔을 것이다. 다른 영화였다면 경찰은 이런 노인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고 나중에 더 큰 화를 입었을 텐데 말이다.
해술이아저씨는괴물을목격한이야기를전날먹었던제육볶음으로시작한다. 경찰에게제보를하는형태를띠고있지만, 어디까지나이이야기의주인공은자신이기때문이다. 〈대장금〉에서도강덕구는밉지않은각색을하는편이었다. 31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 제주도에서관비로살던장금은죽어가는일본왜장을보게된다. 아직수련의녀인장금이시침을주저하자, 왜구는덕구의목숨을빌미로장금에게시침을강요한다. 덕구는제발살려달라며장금에게간청한다. "지조 절개 애국심 이런 거 다 쓸모없는 거야. 누가 왜장 치료 안 해 줬다고 상이나 주겠어?" 장금은 하는수없이왜장을치료한다. 시간이지나덕구는민정호에게이사건을전하면서 "내가먼저내목을걸겠다고나서서장금이의뜻을꺾었고, 그렇게우리가모두살았다"고이야기한다. 사건의각도를살짝틀어자신을주인공으로내세우는강덕구를떠올려보면, 해술이아저씨도진실만을전했을것같지는않다. 이미급한볼일을다해결한후에괴물들을목격한거였는데, 본능적인서사감각으로위기-절정의 플로우를만들었을수도있다. 어쨌든중요한것은 '숲에괴물들이있다'는사실이니말이다. 강덕구의각색에서도중요한진실은결국장금이시침을해사람을살렸다는것이었다. 분명해술이아저씨도이동네에서그런식으로신뢰를쌓았을것이다. 뭔가웃기는소리를많이하는것같지만, 절대헛소리를하지않는사람. 나홍진감독이보았던임현식도우리가보았던임현식과크게다르지않았을것이다.
〈대장금〉(Jewel in the palace, 2003 ~ 2004)
#.3 우리의임현식
임현식은 2017년〈의문의일승〉이후드라마에출연하지않았다. 영화는 2018년〈비밥바룰라〉가마지막이다. 연기를멈춘배경에는내가모르는사연이있을것이다. 다만그가만들어온유형의캐릭터가더이상필요 없는시대라서그런건아닐까싶다. 이제소문은입에서입으로전달되지않는다. 소셜미디어나카카오톡으로유통되고렉카유튜버가큰소리로떠벌린다. 이야기를옮기는 일에사람이필요 없으니, 잘듣고잘전하는사람의자리도사라진다. 마지막작품이후약 8년이지나그를찾은〈호프〉는 1980년대가배경이다. 나홍진감독은관객과의대화에서 '스마트폰'을찍고싶지않아서 1980년대로설정했다고말했다. 역시스마트폰이없는시대에는임오근이나강덕구처럼서사능력을갖춘조력자가필요한것이다. 〈호프〉가배우임현식의황혼에어떤결과를가져올지는알수없지만, 앞으로도임현식이연기할수있는어른들을보고싶은마음이커졌다. 임현식이 현대극에서 조력자를 연기한다면, 그는 이제 소문을 나르는 대신 옛날 이야기를 꺼내주는 역할이어야 할 것이다. 꼭조력자가아니어도나이든순돌이아빠를만나는기분이면좋겠다. 엄청난능력은없지만성실하고자상한아버지, 실없는소리를해도너무실없어서그냥좋은사람, 그래도언제나나의편으로남아있을것같은어른. 그정도로반가웠다.
하이트진로 테라 제로 0.00 350ml
나홍진의 '호프'는 'HOPE'지만, '호프'는 역시 'HOF'다. 요즘은 무알콜 맥주를 마시는 편이다. 그냥 음료수로 마실 때보다, 맛있는 음식에 소주 한 병쯤 비운 뒤 술이 아쉬울 때가 더 좋다. 집 근처 편의점 사장님은 카스 제로가 맛있다며 추천하셨는데, 이것저것 다 마셔보니 테라 제로가 가장 좋았다. 350ml 24캔에 2만 원이다.